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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2일 오전 08:15

Do! and Aha! 2017. 2. 22. 08:20


<恩師, 김용식 교수님 정년퇴임식에 즈음하여>

박사학위과정 스승이신 김용식 교수님의 명예로운 정년퇴임식이 2017년 2월 18일 대구에서 있었다. 김용식 교수님은 세계자연보전연맹 종보전위원회(Korean Plant Specialist Group/SSC/IUCN)의 한국식물전문가그룹 위원장으로서 세계적인 석학이시다. 영남대학교 조경학과에 1983년에 부임하시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국내외의 수많은 석·박사 제자들을 양성하시는데 전념하셨다.
그동안 식물에 관련한 글들을 110여 편의 논문과 저서, 헤아릴 수 없는 보고서, 논설, 칼럼 등으로 아직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보전에 대한 사명, 비전, 전략, 실행방안 들에 대하여 제시하였고, 그것이 단지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정책과 실무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나라 식물원과 조경 분야에서 중책을 맡아 선도적으로 일하는 제자들이 많이 있다. 내가 교수님을 뵙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된 행운이다. 나는 1994년 전까지 두메산골 무지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30대 초반까지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중요한지,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등에 막막하였었다. 배운 것이 일천하여 시험 보는 것마다 낙방을 하고, 인생패배의 길을 이어가고 있었던 암흑기 같은 시기에 교수님을 뵌 것은 인생의 한줄기 서광을 본 것과 같다.
나는 그 때 광양제철소에서 조경현장 소장으로써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저 월급 받아 밥 벌어 먹기식 조경을 하고 있었다. 즉, 조경에 대한 가치나 사명 내지는 비전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저 월급받기에 급급한 졸부로서의 조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하겠다고 대구 영남대학교에 갔을 때 그 당시 학과장님이셨던 김영대 교수님께서 나의 박사과정 입학 동기를 들으시고는 ‘김도균 과장이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내 전공이 아니다’고 하시면서 김용식 교수님을 소개하여 주셨다. 처음 뵌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왜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등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나는 바다매립지(일본말로 임해매립지)에서 조경식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임해매립지 조경식재기법’에 대하여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임해매립지의 조경식재를 잘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까지만 해도 ‘조경식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때 부터 나는 ‘조경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조경이란 일이 단지 나 자신의 밥벌이용 직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주는 가치와 일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칠은 눈비, 감독관들과의 협상, 작업원들과의 실랑이, 주변 토목이나 건축 등의 연관 작업자들과의 시시비비 등으로 부터 극복할 수 있는 지주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는 박사과정에 3번이나 낙방한 고비를 마셔야 했다. 지금이야 내가 3번이나 낙방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창피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무척 속상하는 것이었다. 내가 박사과정에 3번이나 낙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물론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었다.
그래도 틈을 내서 개인적으로 자주 찾아뵙고 식물답사 등에서 사사를 받았다. 입학시험에 낙방한 사람이 찾아왔지만 변함없이 반겨주셨고,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다음에 또 도전해보면 되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희망을 주셨다. 다행히 박사과정 입학시험 네 번째 도전에서 가까스로 합격을 하였다. 기초실력이 엉망인 내게 있어 박사과정 수업은 어마어마한 큰 장벽이었다.
1980년대 배운 조경전문 용어가 2006년에는 수십 배로 증가하여 용어나 개념 자체를 알기가 어려웠고, 수업과정 모두가 영어원서로, 한글로 쓰인 용어를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영어는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수업과정에 용어, 개념, 영어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여도 교수님께서는 한 번도 핀잔을 주거나 누구와 비교도 않으셨고, 오로지 “~~~해보면 어떨까요?”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하셨다. 그것은 ‘질문’인 것 같은데 ‘질문’이라기보다는 ‘비전’을 주시는 것이었다. 직접 답을 주시는 것도 있지만 주로 ‘질문’으로 부터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시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당장 답을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크게 넓게 펼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한 번도 부정적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누구 앞에 나서서 말하기도 어려워하고, 영어는 그야말로 까막눈인데도 외국인들을 만나면 직접 대화를 해보라고 하시고, 영어로 발표하는 학술대회에도 해보라고 하셨다. 지금도 아찔할 때가 많은데 십 여일 전에도 태국에서 못하는 영어지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고 올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이다. 어쩌면 제자가 100점짜리 발표를 하지 못하면 지도교수님 자신이 부끄러워 다시는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항상 100점짜리를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100점짜리가 아니더라도 자꾸 해봄으로써 100점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교수님의 교육철학과 방법이 오늘날 내가 여기에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두메산골 촌놈인 내가 교수가 된 것은 교수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그 가치를 일구게 하셨고, 나의 자존감을 키워 주신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비단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제자나 주변 많은 분들에게도 영향을 주신 것들로 보인다.
이 시대에 있어서 큰 스승이신 교수님께서 정년퇴임은 하셨지만 다행히 여러 수업과 프로젝트들을 계속하신다니 참 다행이다. 교수님 큰 가르침에 대한 은혜에 감사드리며, 항상 평안과 건강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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